사도광산(사도섬) 역사 왜곡 총정리
일본이 사도광산(사도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2015년 군함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포함시키기로 약속했습니다. 일본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군함도를 산업화의 흔적을 담고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미화했습니다. 오늘은 제2의 군함도가 될 수 있다는 사도광산(사도섬)에 대해 알아보고 역사 왜곡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철회될 가능성은 없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사도광산(사도섬)은 어떤 곳?
사도광산은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섬에 위치한 일본 최대의 금산(金山)입니다. 사도광산의 금광맥은 동서 3,000m, 남북 600m, 깊이 800m에 퍼져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산이 V자 모양으로 크고 깊게 파여있는데 과거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금이 채굴됐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601년 사도광산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양의 금맥이 발견되었고 이후 일본의 가장 중요한 재원으로 개발되었습니다. 1869년에는 조선인 강제징용을 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미쓰비시 합자회사가 사도광산을 인수했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자원고갈로 인해 폐광되었습니다. 388년 동안 산출된 금은 78톤, 은은 2,330톤에 달했습니다.
사도광산(사도섬)은 제2의 군함도?
일본은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노동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일본은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했고, 이들은 탄광, 군수공장 등으로 끌려갔습니다. 그중에서 사도광산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수는 최소 1,20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사도광산에서 조선인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노동 환경이 열악하고 강도가 센 탄광 내부는 조선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하지만 군함도와 달리 사도광산과 관련된 연구자료는 국내에 한건밖에 존재하지 않고 영화나 책으로도 알려진 적이 없어 사도섬의 조선인 강제징용 역사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도섬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여수의 사도섬을 떠올리는 분도 있습니다.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
사도광산이 세계문화유산 잠정 후보 목록에 처음 오른 건 2010년입니다. 그동안 4차례나 후보 선정을 노렸지만 번번이 탈락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유네스코에 정식 추천서를 제출하는 2022년 2월 1일을 앞두고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로 선정해 등재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사도광산, 이번에도 역사 왜곡?
10년 넘게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온 일본은 그 시기를 '에도시대'로 한정지었습니다. 조선인 강제징용이 시작된 1930년대 이후 근대는 제외한 것입니다. 한국이 조선인 강제징용을 문제 삼을 것을 대비해 이 같은 조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2007년 발행한 제안서에는 '광업의 근대화', '근대 채굴 구성 자산', '조선 유학생이 사도 기술을 배웠다.' 등의 근대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함도 역사 왜곡 논란이 거셌던 2020년에 제출한 추천서에는 근대와 관련된 내용이 모두 삭제됐습니다.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철회 가능성은?
외교부는 주한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을 불러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 절차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해 즉답을 피하고 "일본 정부의 종합 검토 후 확정"하겠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사도광산은 강제징용 피해자가 조선인으로 한정되어 있고 관련 내용을 증언해줄 피해자를 찾기 어려워 일본의 결정을 막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입니다. 정부가 관련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는 등 역사 왜곡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입니다.